온라인 교육 2년 만에 정상 수업을 실시한 태국 학교. 3개월 여가 지난 현재 학생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수업태도는 최악이다. 수업시간에 자거나, 무언가를 먹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뛰어다니는 등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한다.
선생님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하고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원래 태국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불량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닥 아래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을 요사이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학습태도가 불량인 학생들. 이게 한 두 명이 아니라 전체가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까? 단순히 학생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루한 수업, 흥미롭지 않은 교과서, 열약한 교육 환경 등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원인은 아닐까? 선생님들은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고 기존의 낡은 교육방식과 규범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려 하는데서 문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확실한 사실은 나를 포함한 학교 선생님 모두가 현재 ‘제멜바이스 반사‘를 제대로 맛보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번 글은 현재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 현상, 제멜바이스 반사(Semmelweis Reflex)를 자세히 알아보고, 이를 해결한 방법은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한다. 교육학과 사회 심리학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블립(Blip)을 겪였던 학생들
일단 영화 이야기로 시작하자.
어벤져스가 나오는 마블 영화 속에서 타노스는 인피니티 스톤을 사용해 우주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타노스에 의해 사라진 사람들은 5년 후 어벤져스 멤버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되돌아오게 된다.(1)
이때 5년만에 살아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 현상을 가르켜 마블 세계관에선 블립(Blip)이라고 말한다.
『스파이더맨 홈 커밍』에선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룬다. 블립 당한 형과 5살 많은 동생의 소소한 가족 갈등에서부터 아내의 죽음을 잊기 위해 재혼한 남편에게 찾아온 아내의 슬픈 사랑 이야기 그리고 블립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별 등 다양한 문제가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나는 코로나를 겪고 2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란 존재를 2년간 잊은 학생들. 특히 학교가 어떤 곳인지 거의 몰랐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후 학교에 등교하며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 학생들은 블립을 겪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
블립당한 학생들이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들
코로나로 블립을 당한 학생들 모두는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다가 2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학교로 돌아왔다. 일단 모든 학생들이 등교하자 학교는 활기를 띄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설렘과 같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즐거움에 모두가 만족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점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문제는 컸다. 그 구체적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배움의 즐거움
배우는 것 하나하나 즐거울 때가 있었다. 발표하기 위해 손을 열심히 들고 선생님한테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고 목소리 높여 ‘저요. 저요’ 하던 때가 있다. 이처럼 배움에서 얻는 즐거움, 무언가를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즐거움에 학교 가는 날이 설레던 경험은 모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 차면 그러한 흥미가 점점 사그라든다. 배우는 것들은 재미없고 학교는 지루한 곳이 된다. 특히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유튜브, 틱톡을 보거나 모바일 게임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학생들에게 낯선 교과서와 선생님의 목소리만 있는 수업 시간이 즐거울 리가 없다. 그렇게 그들은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기를 아쉽게 놓쳐버렸다.
2. 규율과 약속
학교라는 곳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약속’이란 것을 가르친다. 약속은 작은 단체에서 회사 심지어는 국가라는 가장 큰 집단에서도 중요하다. 작은 약속들이 모여 규율과 행동 규범을 만들고 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회야말로 신뢰를 토대로 한 안정된 사회가 될 수 있다.
친구와의 약속, 선생님과의 약속, 그리고 학교 규칙을 지키는 약속 등 학교에서는 다양한 규율과 약속을 배울 수 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지켜야 할 약속을 빠른 시간내에 배우기는 쉽지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습관화되고 내면화되어야 비로소 약속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 아쉽게도 블립당한 저학년 학생들은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집에서 해왔던 행동을 학교에서도 한다. 그래서 통제가 어렵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학교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깨끗한 물을 흐리듯 규율과 약속이 망가지고 있다.
3. 강한 독립심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으로 떨어트린다.’ 그렇다. 부모의 울타리 밑에 있는 자녀는 결코 독립심을 배울 수 없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는 집이 아닌 다른 세계로 자녀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아이의 성장을 돕는 최고의 장소는 학교다.
학교에서 맺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고를 통해 아이들은 배우고 성장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성숙한 인간 개체가 된다.
블릿을 당한 9세에서 10세의 아이들은 독립심을 배울 기회,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아쉽게도 놓쳤다. 그래서일까?
이번 학기에는 독립적이지 못하고 단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다. 그들은 소심하고 친구가 없기에 학교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학교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학교를 가기 싫어하며, 아프다는 핑계로 자주 결석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학기 학생들의 결석률이 높다.
블립당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올리면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지친 정신과 몸을 이끌고 교무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수업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을 한다. 나도 그중 하나다.
배움의 즐거움 부재, 약속과 규율 위반, 유난히 약한 독립심 등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수업시간.
떠드는 학생, 낙서하는 학생,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학생은 기본이고 머리가 아파서 양호실을 가야 한다는 학생,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 등 그야말로 총채적 난국이 수업시간 단 한 시간 만에 모두 일어난다. (참고로 태국 초등학교 수업시간은 한 시간이다.)
정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학생들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왕따 사건 혹은 초등학교 일진 사건, 그리고 교사에게 욕하는 불량 학생 등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아직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불교 문화권의 어른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학생들이 많아서 이러한 부정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과연 학생들만의 문제일까?
수업에 집중할 수 없는 학생들. 과연 학생들만의 문제일까?
많은 시간 동안 이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던 중 수업디자인 연구소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현섭 교사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깨달음과 함께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2)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이 배움에 몰입하지 않는 이유는 학생들의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교사는 과거의 수업 성공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 방식 그대로 수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교실에서 학생들이 배움에 몰입하지 않은 이유는 교사보다는 학생들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또한 주변에 있는 다른 교사들의 수업을 살펴보면 자신보다 수업을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자기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 속에 빠지다 보면 시간을 가는 줄 모른다. 학생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기 수업에 만족하게 된다.
‘교사가 자기 수업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의 원인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유’ 중 일부 발췌
비록 코로나 사태 이전 글이지만 이 글의 내용은 지금 현재 학교 교사들아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생의 능력과 만족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수업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수업을 하니 학생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은 학생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오래되고 낡은 기존의 교육환경이라는 틀에 억지로 블립 당한 학생들을 끼어 맞추려는 어리섞은 시도에서 생긴 부작용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블립당한 학생의 문제가 아닌 낡은 교육 환경의 문제였다.
제멜바이스 반사(Semmelweis Reflex)를 경험하고 있는 교사들
낡고 오래된 교육 환경을 개선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를 포함한 모든 교사들은 이 사실을 감히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학생들의 자질 부족과 학부모들의 가정학습이 잘못되었다고 비난만 해오고 있었다.
이렇듯 통상적인 기존의 규범, 믿음, 패러다임과 상충되어 진실과 사실을 외면하고 거부하려는 반사적인 경향을 제멜바이스 반사(Semmelweis Reflex)라고 부른다. (3) (4)
제멜바이스 반사를 극복하는 교사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전부터 해왔던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놓여있다면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쉽게 인정하기가 더욱 힘들다.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은 낡은 교육체계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잘못때문에 수업의 질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왔다. 흡사 1840년대 산모들의 죽음은 외부에서 침투하는 원인모를 질병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산부인과 의사들처럼…
그러나 다행히도 이곳 태국 교사들은 조금씩 바뀌려하고 있다. 학생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어려움과 고충을 들이며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딱딱한 책상과 의자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수업을 하거나 다양한 학교 이벤트를 열어 학교가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제멜바이스 반사를 벗어나는 탈출구
비록 열약한 교육환경이지만, 우리 학교에는 헌신적이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리고 그들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인을 학생 개개인의 문제에서 찾기보다는 학교와 수업이라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학생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지 매주 한 시간 이상의 긴 마라톤 회의를 통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오고 있다. 그리고 회의에서 나온 다양한 교육 방안을 바로 적용해보고, 실패하거나 부족한 부분은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고 있다.
나는 태국 학교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과감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리고 갖고 있는 것을 과감히 버리고 스스로가 바뀌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 근래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 학생들의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자주 보게 된다. 마침내 진심으로 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선생님들이 제멜바이스 반사를 벗어날 탈출구를 찾게 된 것이다.
마무리
나는 지금껏 ‘제멜바이스 반사’를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과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과감히 내려놓는 겸손, 그리고 문제의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 이것이 제멜바이스라는 편견의 함정을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었다.
제멜바이스 교수는 ‘손 씻기’를 통해 기초 위생으로 생명을 구해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마찬가지로 태국 교사들은 ‘헌신과 애정’으로 코로나로 블립 당한 학생들의 미래를 구해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있는 중이다. 나 또한 한 명의 일원으로 늘 겸손된 마음가짐과 진실을 외면하는 않는 자세, 그리고 학생들을 향한 변치 않는 애정과 관심을 갖는 교사로 ‘제멜바이스의 함정’에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출처
- 1) 블립-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위키백과
- 2) 김현섭, 교사가 자기 수업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의 원인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유, 2015/11/17, 수업디자인연구소
- 3) 글 깍는 의사,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의사-과학자, 제멜바이스, 과학이 있는 삶, 2019/1/30
- 4) 박규태, 인생은 자기 소신과 더불어 가는 먼 길이다, 치의신보, 2018/9/20